지금은 넓디 넓은 캐나다 땅에 살고 있지만 나는 자랑스런 한국의 시골 촌뜨기(^^;) 출신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오빠가 6학년, 우리 가족은 내가 꿈에 그리던 도회지로 이사를 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주'가 맞을 것이다.
1980년 무렵, 대청댐이 들어온다는 반박 불가의 사유로 거주민들은 거부할 권리도 없이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
다 . 대부분의 집들은 살던 곳과 멀지 않은 곳, 새로 형성된 부락으로 들어갔지만 자식들의 교육열이 나름 높았던 우리
부모님은 그 참에 몇해 전, 큰 딸(당시 중3)을 유학시켜 놓은 대전을 선택해 거국적 이주를 하셨다.
내 어릴 적 기억에 엄마는 오빠와 나를 데리고 한달에 한 번 정도, 언니를 보기 위해 대전에 나갔었는데 그때마다 철부지 '나'는 대전이란 도시의 화려함(^^)에 문화적 충격을 늘 받아 돌아왔었다.
내가 살던 시골은 하루에 한 번 들어오던 버스가 대전엔 수없이 길거리를 누비고 더구나 버스 외에 작은 차들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 나오며 사람들은 왜 그리 붐벼나는지, 철부지 소녀의 눈높이에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더군다나 엄마가 혼자 대전에 나갔다 오시면 사다 주시는 종이 인형들이 문방구라는 곳에 가면 언제든, 얼마든 살 수 있고, 또 멋진 양옥집과 상점은 어찌나 많고 멋지던지...
심봉사가 눈이 떠지듯 도시에 눈이 트이면서 어린 '나'는 도시살이를 꿈꾸며 어떻게 하면 대전으로 나가 살 수 있을지, 고민이 있었지만 여덟살 인생이 이유를 찾기엔 언니의 나이가 될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우리 가족이 떠나야 하는 명목이 생기며 동경하던 곳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소망하던 꿈의 도시로 떠난다는 설렘은 흙먼지 맡으며 함께 뛰놀던 친구들을 향해 '나는 이제 너희와 노는 물이 달라' 라는 우쭐함으로 변했고 그 증표로 아끼던 종이 인형들을 선심 쓰듯 다 준 것이다.
참...유치한 허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 사람들을 막연히 동경했던 소녀는 도시의 집들 사이에 우리 집이 이웃 사촌이 된다는 자체에 홀려서 자기 인생의 모든 꿈을 이뤘다는 다소 어이없는 멋부림과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도시 생활의 꿈에 젖어 있던 아홉살 철부지 나와 달리, 사춘기로 접어 들어가는 6학년 오빠에게 갑작스런 도시로의 이사가 너무 싫었던 모양이다.
매일 매일 산으로, 들로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하루를 참 바쁘고 알차게 썼던 오빠가 도시로 나오면서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말 수도 줄고 방학이면 시골의 큰 집에 가서 오지 않으려 했었다.
내 어렴풋한 기억에, 시골로 다시 전학을 시켜달라고 떼쓰는 오빠의 잔상이 남아 있다. (물론 엄마한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천둥벌거숭이였던 아홉살 '나'는 동경하던 도시 생활의 환상에 빠졌었고 오빠는 고향의 향수에 취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 다른 감성으로 시작된 도시의 생활.
너무 커진, 학교, 너무 많은 학생들, 너무 많은 선생님, 그 속에서 주목받지 못 하는 아홉살 '나'와 열 세살 '오빠'.
시골에서는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관심받고 늘 중심에 있었던 우리였건만 도시에 오니 그저 수 많은 학생들 중 한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시골에서 전학 왔다는 첫 인사에 아이들은 거기가 어디야? 라며 나를 외계인처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어리지만 자존심이 있었는지 집에만 오면 학교 가기 싫다고 울었는데 그것도 잠시, 외계인에게 친구들이 뭔가 궁금한지
말을 걸어왔고 나는 살아남으려 열심히 어울려 다니며 소외되지 않으려 애쓴 기억이 있다.
어찌 되었건 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갔고 오빠 나이가 되던 6학년 무렵, 시골에 놀러를 갔다.
시골에 살고 있던 중학생 사촌 오빠가 "너희 옛날 집 가보고 싶지 않아?" 라고 하며 나룻배를 태워줬다. 나는 왜 우리 집
가는데 강으로 가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그 의구심이 사라졌다.
오빠가 나룻배를 멈추더니 "여기가 너희집. 이 밑에 너희 집이 있어. "
'맞아. 우리 집은 대청댐이 들어와서 물에 잠겼지.'
아주 어렸을 적 받았던 도시의 문화적 충격과는 사뭇 다른 충격이었다. 강물 속에는 내가 여덟살까지 살았던 인생의 시
계가 여전히 움직여서 그 때의 모든 시절이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집을 뒤로하고 멀어져 올 때, 아픈 친구를 두고 떠나는 이기적이고 못 된 친구가 된 듯한 감정이 밀려왔다.
흙먼지 풀풀 마시며 뛰놀던 내 고향, 강물 속에 우리의 집, 우리의 유년을 두고 오는 깊은 슬픔을, 오빠는 철부지 동생보
다 미리 느꼈었지 않았을까?
물에 잠긴 우리 집에 점점 멀어지면서 도시로 이사가기 싫어했던 오빠의 그 마음이 그제서야 헤아려졌다.
도시에 살고픈 시골의 어린 소녀는 40년이 흐른 지금, 태생적으로 얻은 고마운 유년의 추억을 반추하며 대전에서 서울
로, 서울에서 캐나다 밴쿠버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골 소녀의 호기심과 하고픈 많은 일들은 여전히 진행중이지만 도시 사람이 되고픈 꿈은 그래도 이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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