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12년의 시계는 오늘도 흘러간다
한국을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어간다.
내가 정말 다녀온 게 맞나? 싶을 만큼 시간이 미친 듯 빨리 가서 마치 시간이 눈처럼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나의 친구들이 물어봤다.
"네가 밴쿠버에 산지 한... 10년 됐지?"
해맑게 나는 말했다.
"정확히 12년이네."
나도 몰랐다. 내가 10년 넘게 낯설고 물선 밴쿠버에서 살아가고 있을 줄이야...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사는 걸 어떤 이는 부러워하고 어떤 이는 언어도, 음식도, 가족도, 친구도 익숙했던 것에서 멀어짐에 대한 불편함이 싫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여행자처럼 사는 삶이라고 동경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게 맞지도 않고 모든 게 틀리다고 할 수도 없다.
요즘이야 이민가는 사람들도 많고 각국에서 해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그들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올리는 걸 쉽게 찾아볼 수 있기에 그리 멀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한국을 잠시 다녀온 뒤, 새삼 12년을 살아온 밴쿠버의 삶이 의문문이었는지 감탄문이었는지 궁금해졌다.
나름 환경에 적응 잘하고, 낯섦을 거부하지 않는 나는 과연 이곳에서 어떤 모양으로 살아왔을까?
그냥... 두서없고 맥락 없이 몇 자 끄적여 본다.
캐나다는 매년 살기좋은 나라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국가다. 실제로 살아보면 한국보다 더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 어디든 그렇듯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영주권 취득 후 살아가는 이민자로서 느끼는 단점도 분명 존재한다.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가 있다. 물론 향수병이라는 단어가 괜히 생긴 건 아니겠지만 유독 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타지생활 자체가 주는 심리적 압박감 때문일 것이다. 낯선 환경 탓에 모든 일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기 일쑤다. 뿐만 아니라 언어 장벽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현지인들과 대화하다가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상대방이 비웃거나 놀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그럴 땐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또한,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가령 갑자기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다. 해외에 사는 경우, 병원비나 치료비 부담도 만만치 않지만 당장 갈 수 있는 병원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캐나다는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웬만한 질병과 사고, 응급상황 등등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지만 대기 시간이 길고 절차가 복잡하다는 단점이 있다.
이렇듯 무엇이든, 어떤 곳이든, 내가 발붙여 사는 곳이라면 장, 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해외에서의 생활이 다소 불편한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쿠버만의 특별한 경험 덕분에 지금까지도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매일 아침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라든가 맑은 공기, 동네 예쁜 카페에서의 커피 한잔 등 소소하지만 감사한 일들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곳에서 만난 귀한 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자 위안이자 축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자면 어찌됐든 나의 은근한 적응력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기분도 들었다. 나는 성격상, 어딜 가든 그곳에 쉽게 녹아드는 스타일이었다. 여행이나 출장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밴쿠버에서의 생활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민생활의 적응은, 그 적응력의 색깔이 여행이나 출장 같은 단타적인 것과는 달랐다. 한국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엔 친구 한 명 없는 외국에서 남편만 바라보며 하루하루 버티느라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생존형 적응을 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이민 초기엔 마트 장보기라든가 은행 업무 같은 지극히 사소한 일조차 나 혼자서는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서글프고 자존감도 떨어졌었다. 또한 한국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자주 만날 수 없다는 점도 아쉬웠다. 어쨌든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은 내가 언제 적응이 어려웠냐는 듯 익숙해져 갔고 누군가에게 이민 생활의 길잡이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물어본다.
이민생활, 더구나 우리는 자녀도 없는데 외롭지가 않냐고...
글쎄... 많은 식구가 북적거리고 살아도, 둘이 살아도 외로움은 있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의 서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살다 보니 외로움이 다가왔다가도 스쳐 지나가더라.
가족이 많든, 친구가 많든 그래도 누구에게나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런 소소한 순간들을 즐기며 충전을 한다. 혼자의 시간이 12년이란 이민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준 삶의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혼자의 시간이란 것이 꼭 멀리 갈 필요는 없다. 가까운 공원 벤치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어보라. 눈을 감고 햇살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12년 해외 생활을 해보니 환경만 다를 뿐, 사람 사는 모양새는 다 똑같고 중요한 건 스스로 행복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곳이 밴쿠버이든, 한국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