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트라우마는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는 선량하지만 불행과 고통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벙어리 여인 아다다를 통해 사회적 불균형과 물질 만능주의를 꼬집는 메세지가 담겨있다.
'돈'때문에 울고 웃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1930년대나 지금이나 배경만 다를 뿐, 평행이론처럼 같다는 점은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암튼, 학창시절 시험을 보기 위해 배우고 익혔던 백치 아다다의 주제의식이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묵직한 울림이 있는 작품임은 확실하다.
소설을 접하기 전, 중학생때, 영화 "백치 아다다"를 봤었다.
아다다의 돈만 보고 그녀를 버렸던 전 남편처럼, 새로 만난 남자도 돈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서 돈을 바다에 던지다니!!! 그 당시 중학생의 시선에서 아다다의 거침없는 행동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리지만 너무 현실적이고 까칠했던 사춘기 소녀의 관점에서 '뭘 저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돈을 버리기까지 하나?' 라고 아다다를 이해하지 못한 지점이었던 듯 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소설이 말하는 묵직한 주제의식보다 오히려 '아다다'란 여인이 돈을 바다에 던져야 했던 필연적 이유가 와닿았다.
그녀가 바다에 던진 돈 항아리는 같은 경험으로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즉 돈이 자신의 고통의 데자뷰라 여겨, 두려움에 눌린 그녀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요즘 소위 말하는 '트라우마'가 그녀를 지배했던 것 일 게다.
트라우마라고 말하지만 쉽게 말하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작던지 크던지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그녀처럼 자기 방어가 강해지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는 내 상처를 알아달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그래...차라리 아우성일지라도 상처가 곪지 않도록 용기있게 소리를 치는 것이 다가 오는 내일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간혹, 같은 상처를 받지 않으리라는 자기 방어때문에 나의 상처나 아픔을 사용해서 상대방을 짓누르는 경우도 보았다. 자신의 상처에만 너무 몰입한 나머지 상대에게 전이시키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 해서 생기는 일인 것 같다.
트라우마는 숨어야 하는 첩자도 아니지만 절대 반지가 되어서도 아니될 터이다. 즉 트라우마로 나를 과대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기나긴 인생,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트라우마'라는 족쇄에 잡혀서 두려움과 상처로 발이 묶이거나 반대로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를 주는 당사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트라우마를 하나쯤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나는 내 트라우마를 가지고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아다다의 모습 어디쯤에 내가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에게 나의 트라우마를 전이시키고 있지는 않겠지?
'아다다'가 돈을 바다에 던짐으로 인해 반대로 그의 새 남편 수롱은 엄청난 트라우마에 빠지지 않았을까?
결국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Give & Take'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를 돌아보며 살아가다 보면
'트라우마'라는 넘사벽 장애물쯤 거뜬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 감히 얘기해 본다.